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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17 현상학적 심리치료
글
현상학적 심리치료
저는 인식된 실재(實在)에 순응 합니다.
현상학적 심리치료
의도 없이 봄
선생님은 자신의 심리치료를 현상학적 심리치료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현상학은 하나의 철학적인 방법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현상학은 보다 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관관계에 나를 맡김을 말합니다. 도우려는 혹은 무엇을 증명하려는 의도 없이 나를 맡김을 말합니다. 나타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공포 없이 나를 맡깁니다. 아주 참혹한 것이 나타나도 저에게 공포가 없습니다. 존재의 모든 것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가족 세우기에서 저는 거기에 서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서 있지 않은 사람도 봅니다. 그들 모두는 내 앞에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맡기고 있으면 현상의 뒷면에 있는 통찰력이 번개같이 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가족 세우기에서 저는 갑자기 한 아이가 살해된 것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상은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 구성원의 행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압축되어 있으며 이 본질적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상을 직시함으로써만 갑자기 빛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방법입니다. 어떤 학파에 속하지도 않고 어떤 학파의 기초가 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현상을 직시하고 목적과 공포 없이 나를 맡길 때만 내면이 정화되어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순식간의 번뜩임은 누구나 경험 합니다.
어떤 틀이 없으면 직시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가족에게서 양심과 죄와 관련된 현상들을 보고 이 현상에 집중합니다. 모든 것을 볼 수 는 없습니다. 틀이 필요 합니다.
사랑
어떻게 이것을 통찰하게 되었습니까?
설명은 보통 경험한 후에 할 수 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여섯 사람을 위한 워크숍을 주도했었습니다. 다섯 사람이 반원으로 앉고 한 사람이 마주보며 그 앞에 앉았습니다. 다섯 사람에게 그 한 사람을 폭 넓은 주의력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놀라움을 가지고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 한사람을 위해 빛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모두 그의 본질 성을 알아챘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그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앞에서 즉시 변화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실을 본다는 것은 수용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에너지 장을 형성해서 주위에 효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이 연습을 통해 현상학적인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알려고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운명을 가진 그, 그러한 가족을 가진 그, 그러한 문제를 가진 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확실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너무 빠져들면 -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대게 그렇습니다만 - 그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참 모습을 보게 하는 강렬한 친밀감은 거리를 유지해야만 가능합니다. 밀착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의도가 없는 즉, 존재가 효과를 가져오는 공간에서만 가능합니다. 더 이상의 것은 없습니다.
전체적인 것
개인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은 관찰자에게 발생하는 투사와 느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첫째는, 의도 없이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정화입니다.
두 번째는, 아마도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공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을 보거나 말할 때에는 나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가지고 개인적인 의도 없이 바라본다면 단지 선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지난번에 한 젊은이가 워크숍에 참석했습니다. 첫 번째 인상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그 때 저에게 분명하게 온 것은 그가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그 곳을 보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저에게 조금 시간을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그는 심연의 에너지와 연결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설명을 하면 사람들은 헬링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당연히 이런 말을 하거나 듣는다는 것은 아주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나타날 수 있는 것을 공포없이 보아야만 합니다.
선생님이 연습에서 사랑을 가지고 보아야만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격분하고, 또 다른 이는 투사하게 됩니다.
제가 이제까지 몰랐던 사람과 일을 할 때에도 저는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제가 그와 함께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방법으로 나무를 관찰하게 되면, 모든 나무가 다 아름답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그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효과
이 순간 우리는 어던 것을 유발시키는 인식 에너지와 연결됩니다. 예를 들면, 성장에너지 같은 것이지요. 만약 저에게 의뢰인을 위해 이러한 인식의 해결이 나타나면 이것은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그 얼굴들이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제 관찰이 맞는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저는 테스트를 해봅니다. 의뢰인의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제가 말하고 행한 것은 헛수고입니다. 그의 얼굴이 환해진 것을 보게 되면 제가 적중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면의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좋은 것을 유발시키는 에너지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에너지와 연결되었으며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반된 현상
마술처럼 들리는데요?
야콥 슈타이너 Jacob Steiner 가 쓴 책 Rilkes Duineser Elegies을 조금 읽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만들어내는 정반합(正反合)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반합에서 -헤겔과 마찬가지로- 모든 반은 정의 어느부분이 틀렸다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그 부분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정반합의 사고에서는 모든 것을 원초적으로 의심하게 된다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다른 어떤 것이 그의 실제의 가면을 벗기도록 원래부터 구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의 가능성은 반드시 그의 효과를 제한합니다. 제가 사랑을 증오의 반대로 이해하게 되어서 공존한다고 하면 사랑과 증오는 상대적이 되며 어느 하나를 잘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른 것과 대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현상학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합의 사고가 아닙니다. 저는 상반된 현상을 하나로 봅니다. 선과 악은 정치적으로 상반된 주의들을 하나로 보지요. 이렇게 되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반(反)은 정(正)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반은 하나의 새로운 인식인 것입니다. 제가 하나의 질서를 발견했고 다른 어떤 사람이 다른 질서를 발견했다면 그는 나의 인식에 무엇을 더해 준 것입니다. 그의 인식이 반이 되어 나의 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의 통찰은 반이 없는 하나의 합이 되는 것이지요. 반의 파괴성은 이 반이 어떤 새로운 지각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단지 사고를 통할 때만 발합니다.
반(反)에의 충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 입니까?
이 반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권한이라는 환상을 가져다줍니다. 한 사람이 저에게 말할 때마다 제가 현실에 상관없이 하나의 반을 세운다고 해 봅시다. 이것은 저에게 자유의 느낌을 줍니다. 저는 나의 반으로 어떤 것에든지 의문을 던질 수 있으며, 그것으로 건설적인 것을 할 필요 없이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현상학적인 방법을 취하여 보이는 대로의 현실에 나를 세우면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원하는 자유를 포기하게 됩니다. 저는 인식되어진 현실에 저를 종속시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저를 종속시킴으로써 저는 행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자의적으로 반을 세우는 사람은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유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자유
저는 불안합니다. 선생님의 자유의 개념은 계몽주의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우리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만 이 길들이 어디로 나를 인도 할까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 질서에 반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만 그의 결과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주어진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자유는 자기 행동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저는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저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상상만 하고 있다면 저에게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남겠습니까? 이에 반해 제가 현상학적인 방법을 취하게 되면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어 저는 행동할 수 있는 힘과 여유를 갖게 됩니다. 이 여유 안에서 저는 자유를 느낍니다. 이와 관련해서 널리 유포된 사고가 있습니다. 즉, 틀린 것을 위해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으면 그것은 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하기 보다는 변명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이제 이별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
선생님은 카톨릭적이며 테라피에 성경을 전용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카톨릭 선교단에 속하셨었는데 무엇이 그곳을 탈퇴하도록 하였나요?
저는 교회에서 컸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성장이었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곳을 지나왔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저는 성장했으며 나의 과거에 속한 일입니다. 여러 면에서 저에게 선하게 작용합니다만 저는 거기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들과 우정어린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저는 그들이 하는 일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모든 교회가 없어진다면 우리에게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존경함으로써 그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단과 이별하고 심리치료를 함으로서 선생님의 가치체계가 바뀌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심리치료에서 특히 원초적인 심리치료에서 저는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점을 누가 이야기 했을 때 가끔 치료사는 울었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이 동정심을 가지고 우는 것을 볼 때 저는 압도되었습니다. 제가 젊을 때 남아프리카의 한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아주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믿음이 있어야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믿음은 곧바로 서게 하면서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어도 아주 선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무엇이 인간을 존경하는 것이고, 인간의 존엄성 인가를 경험 했습니다. 어느 집단에 속해서가 아니고 단지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삶의 얽힘과 풀림에 관한 Bert Hellinger 와의 대화’ 46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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